열다섯 ‘미결정존재’들의 알싸한 두 세계 이야기- 『결정 거부자』 설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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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다섯 ‘미결정존재’들의 알싸한 두 세계 이야기

『결정 거부자』 설흔 작가 인터뷰 

 

『결정 거부자』는 열다섯 생일에 부모의 재산과 학교 성적으로 성별, 직업, 미래가 결정되는 독특한 세계관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두 세계’ 이야기다. 그리고 정해진 길을 거부하고 희망을 찾아 나서는 열다섯들의 알싸한 성장담이기도 하다.

 

『결정 거부자』의 가장 큰 매력은 이야기가 독특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펼쳐진다는 데 있습니다. 작품을 처음 집필하실 때 세계관부터 만들어 놓고 이야기를 써 나가기 시작하셨겠죠? ‘히나’와 ‘브로글’로 대비되는 성별 반전 유니버스를 왜 탄생시키셨는지, 또 어떤 과정을 거쳐 세계관을 완성시키셨는지 궁금합니다.

성서의 표현을 가져와 말하자면 시작은 극히 미약했습니다. 성별을 바꾸어보면 어떨까, 15세의 나이에 성별을 결정하는 사회가 있다면 어떨까, 가 전부였습니다. 두 가지 설정을 머리에 넣고 틈날 때마다 굴리다 보니 조금씩 살이 붙었고, 창대하지는 않아도 제법 통통한 유니버스가 튀어나왔습니다. 왜 이런 유니버스를 만들었느냐고 묻는다면 거꾸로 가는 현 세계에 대한 모종의 불만 때문이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암울하고 꽉 막혀 있을 때는 상상력으로라도 벽을 돌파하고 부수어야 하는 법이니까요.

『결정 거부자』는 두 개의 이야기가 맞물려 진행되는데, 작품을 이렇게 두 개의 이야기로 구성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또, 각각의 이야기를 ‘레드 스테이지’, ‘블루 스테이지’라고 이름 붙여 주셨습니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처음부터 두 개의 이야기를 구상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유니버스의 두 축인 15세(성별을 결정하는 시기)와 49세(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시기)의 이야기를 따로 다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늘 의도를 거스르지요. 두 이야기는 스스로 알아서 길을 찾아갔고, 원래의 도식적인 구성에서 벗어나 15세와 49세의 선택을 진지하게 다루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야기로 완성이 되었습니다. 레드와 블루에 큰 의미는 없습니다. 등장인물의 이름인 피비와 호머, 지역 이름인 니르바타와 유레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각각의 이름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한한 의미가 담겨있지요. 그 의미를 찾는 건 독자의 몫입니다.

 

 

 

 

작품 속 인물인 수진은 집에 돈도 별로 없고, 성적도 별로, 하고 싶은 일도 없는 열다섯으로 등장합니다. 심지어 책도 많이 읽고 아는 것도 많은 데도 일부러 아무것도 모르는 척,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수진의 캐릭터를 이렇게 설정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돈과 점수, 그리고 약간의 행운으로 미래가 결정되는 유니버스에 수진의 자리는 없습니다. 남보다 뛰어난 감수성과 통찰력을 지닌 수진이지만 결정권자들이 보기엔 아무것도 없는 미결정 존재일 뿐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인정조차 하지 않는 사회에서 수진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의 감수성과 통찰력을 드러내 보이며 내가 여기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기엔 세상은 너무 완고하고, 수진은 너무 어린 나이에 세상의 진실을 깨달았습니다. 암울한 이야기지요. 그러나 실상은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가진 것을 다 보이면서 사는 미결정존재(우리 세계 용어로 말하면 청소년)는 거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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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속 인물인 호머는 기초학교에서 선생님과 친구들의 괴롭힘으로부터 자신을 도운 친구멜버른에게 도와 준 이유를 묻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가까워지고 싶어서도 아니고, 왠지 느낌이 좋아서도 아니고, 마음이 통할 것 같아서도 아니고 단지 호머가 “제일 외롭고 불쌍해 보여서.” 도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호머는 상처를 입습니다. 멜버른은 어느 정도 호머를 좋아했을 텐데, 굳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작가님께서 이 에피소드를 통해 ‘우정’에 대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아마 멜버른은 조금 더 요령 있게 대답할 수도 있었겠지요. ‘친구니까’와 같은 무난한 표현, ‘네가 좋아서’와 같은 조금 더 진한 표현, 아니면 빙긋 웃음으로 대신할 수도 있었겠지요. 멜버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도리어 묻고 싶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 멜버른의 과거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아마도 멜버른은 ‘부드럽고 번지르르한 말’에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편인 줄 알고 무작정 다가갔다가 엄청난 배신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심했겠지요. 말로 자신을 속이는 사람은 되지 않겠다고요.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 저는 멜버른이 아니니까요.

 

『결정 거부자』에는 삼총사, 악의 삼인방처럼 세 사람이 하나의 그룹을 이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초학교에서 학교폭력을 저지르는 아이들도 셋이 몰려다니는 것처럼, 작품 속 장면들에 세 사람이 한 세트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작가님께서 특별히 ‘셋’을 모아 이야기를 즐겨 만드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작품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는 게 좋겠습니다.

‘셋은 마법의 숫자였다. 미니 게임은 물론, 더블 플레이와 도루 연습도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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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 거부자』 어떻게 보면 가출로 시작해서 가출로 끝나는 이야기인데요, 읽다 보면 왠지 작가님께서 청소년 독자들에게 가출을 권하시는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 혹시 작가님께서도 가출을 해 본 경험이 있으실까요? 십 대들에게 가출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이 세계의 학부모들에게 욕먹을 짓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가출,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참고삼아 말씀드리면 성현으로 추앙받는 이이는 19세의 나이였던 1554년 3월 어느 날 집을 나와 무려 1년 후에 귀가했습니다. 그 후 이이가 과거 시험에서 아홉 차례의 장원을 차지한 일은 널리 알려진 일화입니다. 물론 가출에서 얻은 깨달음으로 과거 시험에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가출,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무척 좋아했던 가수 신해철은 ‘길 위에서’라는 노래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습니다. ‘차가워지는 겨울바람 사이로 난 거리에 서 있었네. 크고 작은 길들이 만나는 곳, 나의 길도 있으리라 여겼지. 생각에 잠겨 한참을 걸어가다 나의 눈에 비친 세상은 학교에서 배웠던 것처럼 아름답지만은 않았었지.’

그렇습니다. 사람은 길 위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깨달음을 얻는 법입니다. 뭐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작가님은 ‘역사와 고전의 연금술사’로 부를 수 있을 만큼 연암 박지원, 이황, 이이 등 오래전 멋진 생을 살다 간 인물들의 삶에 생각을 작품 속에 녹여내는 능력이 탁월하신 것으로 유명합니다. 『결정 거부자』에도 그 능력을 잘 발휘하셨는데요, 어떤 장치들을 심어 두셨는지 궁금합니다.

 

SF를 표방한 작품에 이황의 ‘성학십도’가 등장한 건 모르긴 몰라도 역사상 처음이 아닐까 합니다! 성학십도와 SF는 하늘과 땅처럼 멀게만 느껴집니다. 하지만 성학십도는 사실 우주와 인간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바꿔 말하면 SF에서 즐겨 다루는 주제는 이미 성학십도에 다 들어 있다는 것이지요. 저는 고전에만 길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전이 철 지난 옛이야기라는 견해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훌륭한 이야기는 시공을 가리지 않는 법입니다. 질문에 답하자면, 고전에서 얻은 제 지식이 이 작품에 어떤 식으로 반영되었는지를 밝히는 건 제 몫이 아닙니다. 다만 이렇게는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건강하고 즐거운 결정 거부자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설흔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에서 심리학을 공부했다. 평범한 회사 생활을 하던 중 연암 박지원의 글을 읽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멋진 생을 살다 간 인물들의 삶과 사상에 관심이 높아 그들이 생각하고 열망한 것들을 지금 시대의 언어로 소개하는, 역사와 고전의 연금술사.

『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로 제1회 창비청소년도서상 대상을 수상했고, 『네 통의 편지』 『붉은 까마귀』 『소년, 아란타로 가다』 『우정 지속의 법칙』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